“漢文”에 대한 加藤 徹선생의 小稿 (번역) – 1/2

* 2008. 10. 13에 textcube.com에 올렸던 글 입니다.

카토 토오루(加藤 徹) 선생은 일본 메이지 대학의 교수로 우리나라에서는 “貝의 중국인 羊의 중국인”과  “한문의 생활력 (최근 “동양고전에게 길을 묻다”로 재간됨)이란 번역서로 잘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1963년생이면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중국문학, 중국경극 등의 중국문화 전문가로 일본에서 유명하더군요.


加藤徹 교수 (사진출처: 요미우리 온라인)

특히 “貝의 중국인 羊의 중국인”은 읽으면서도 시종일관 무릎을 치며 ‘오 그렇군!’ 을 외치며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선생에 대한 다양한 글을 언제라도 접하고 싶어지는 것이 애독자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번 역한 내용은 월간 문예지 “中央共論” 2008년 6월호 특집 중 하나였던 “중국고전의 예지에서 배우다(中国古典の叡智に学ぶ) 중 하나인 “명치유신을 가능케 했던 일본독자의 한문훈독문화(明治維新を可能にした日本独自の漢文訓読文化)”의 일부분 입니다. (써놓고 나니 상당히 복잡해 보이네요)

글 의 기본 내용은 일본이 에도시대를 지내면서 한문을 音讀이 아닌 訓讀 그러니까 뜻으로 읽는 방식의 한문 독법을 사용해서 에도 말기에는 “중류층 실무계급”이라는 식자계층이 생겨나게 되었고, 궁극적으론 메이지 유신의 길을 열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번역은 全文이 아니고 그 중 일부입니다. (원문은 PDF로 스캔을 받아놨으니 혹시 필요하신 분은 메일로 요청 주세요)

* 주의: 본 번역내용은 제가 개인적인 관심으로 진행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의 중앙공론신사 및 저자인 加藤徹 선생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임의로 진행한 내용입니다. 가능하면 개인적으로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

명치유신을 가능케 했던 일본독자의 한문훈독문화
(明治維新を可能にした日本独自の漢文訓読文化)

1. “오아시”의 어원도 사실은 한문

<중략>

2. 라틴어와의 차이
동양의 한문은 곧잘 서양의 라틴어와 비교된다. 한문도 라틴어도 권위 있는 고전어로 근대이전의 학술계의 국제어로서의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라틴어와 한문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라틴어는 본질적으로 자연언어이다. 일본어 및 영어와 같이 문자로 읽어도 알 수 있으며 음성을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이해가 된다.

한 문은 다르다. 자연언어로서의 중국어를 토대로 하면서도 기원전 14세기의 갑골문의 시대에서부터 서기언어書記言語로써 특화된 인공언어이다. 눈으로 읽기 위한 언어로서 고도의 완성을 보이는 대상으로, 음성언어로서의 기능을 희생하게 되었다. 한문의 문제와 어법은 간결하다. 센텐스도 짧다. 역으로 말하면 언어학적 리던던시redundancy (용장성冗長性에 의한 여유餘裕)가 결여되어있으며 동음이의어도 많다. 눈으로 글자를 읽는 쪽은 문제가 없지만 귀로 한문을 듣는 것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라 틴어는 한문만큼 간결하지 않다. 한문과 다르게 격변화나 활용 등의 리던던시(redundancy)가 풍부하여 귀로 들을 때도 이해하기가 쉽다. 라틴어를 현대 이탈리아어로 번역해도 길이는 그렇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문을 현대 중국어로 번역하는 경우 조사와 보조사를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원문의 두 배정도의 길이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실 제 라틴어로 연설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한문으로는 연설이 불가능하다. 고대 로마에는 회의와 광장 등의 연설을 위한 도시공간이 있었다. 케이사르도 아우구스투스도 청중을 앞에 두고 라틴어로 연설을 했다.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현대까지 서양의 도시문명은 “의회, 연설, 연극”의 세 개의 세트로부터 형성된 연설문화 깊은 관련이 있다.

동양에서는 후쿠사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스피치(Speech)에 대해 “연설(演說)”이라는 단어를 고안하기 전 까지 연설이라는 발상조차 없었다. 서양의 정치가는 연설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연극의 대사를 표본으로 했다. 하지만 동양의 연극, 특히 가무기예나 경극의 대사를 아무리 공부한다고 해도 연설은 불가능하다. 가무기예도 경극도 서양적인 의미로의 연극은 원래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경극京劇”을 참조하기 바란다)

삼국지의 조조는 한시 작가로도 일류였으며 제갈공명은 천고의 명문인 “출사표(出師表)”를 썼다. 하지만 그들도 연설은 가능하지 않았다.

분 명히 제갈공명이 쓴 “출사표” 훌륭하다. 중국어로 음독을 하더라도 또 일본으로 훈독을 하더라도 그 메아리는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단지 일본어에 의한 훈독은 차치하고 중국어의 음독을 귀로 듣는 것만으로는 중국인이라 하더라도 내용의 반도 이해할 수 없다. 현대 중국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공명과 동시대의 중국인라 할지라도 역시 그랬다. “출사표”는 대중에게 호소하는 연설은 아니다. “출장 전에 어린 주군(유비의 아들인 유선)에게 바치는 “공개서간(公開書簡)”이었다. 만약 공명이 라틴어권의 영웅이었다면 촉한의 백성을 광장에 모아놓고 자국의 대의에 대해 명연설을 남겼을 것이다.

라틴어는 고전언어이지만 현재에도 음성언어로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핀란드국영방송국에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뉴스 프로그램을 지금도 매주 라디오를 통해 방송하고 있다. 라틴어의 습득자라면 듣는 것만으로도 이해가 가능하다

한문을 사용하는 라디오 뉴스 방송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TV나 영화와 같이 자막이 흐르지 않는 한, 고전에 정통한 중국인이라 할지라도 한문을 귀로 듣는 것만으로 이해하는 가능하지 않다.


3. 한문과 중국어는 별개이다.

서기언어로 특화된 한문과 구두언어(口頭言語)인 중국어는 별개이다. 이것은 중국인 스스로가 더 잘 인식하고 있다. 명나라의 조남성(趙南星)의 “笑贊”에 이러한 우스운 내용이 있다. 어떤 수재秀才가 장작을 사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秀才는 과거의 시험의 첫 단계인 원시院試에 합격한 자를 말함. 일본의 수재의 의미와 다름) 수험공부로 한문에 절여있던 이 수재는 말하는 언어도 완전히 한문이 되어있었다. 길 앞의 한 남자가 팔기위한 장작을 등에 매고 걷고 있었다. 수재는 한문으로 그 남자를 불렀다.

荷薪者, 過來 (땔감을 짊어진 자, 이곳으로 오라)

“荷薪者“ 한문이지만 ”過來“라는 단어는 중국어이다. 남자는 ”이곳으로 오라“라고 하는 단어밖에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수재는 가격을 한문으로 적었다.

基價幾何 (이 가격은 얼마인가)

남자는 “價”라는 단어밖에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가격을 말해 주었다. 수재는 가격을 깍을 심사로 한문으로 말했다.

外實而內虛, 煙多而焰小, 請損之 (바깥은 실한데 안쪽은 허하다. 연기가 많이 나고 불꽃이 적다. 청한다. 가격을 깎아 달라) 남자는 수재가 무엇을 말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해서 장작을 등에 메고 돌아갔다.

<중략 – 일본의 라쿠고(落言)의 유사한 에피소드 내용>

당 唐의 백락천白樂天은 한시를 지을 때, 가장 먼저 무학無學의 노파에게 읽어 준 뒤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평이平易한 말로 다시 수정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화로 진실은 아니다. 분명히 백락천의 시는 한문 작품치고는 평이한 편이다. 하지만 역시 한문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음독을 귀로 듣는 것만으로는 백퍼센트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 “한문”의 역사는 겨우 3천년

라틴어와 한문에는 또 한가지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본질적으로 음성언어인 라틴어는 세계의 어떤 나라 사람이 공부해도 라틴어이다. 하지만 한문은 나라에 따라 “漢文”이 아닐 수 있다. 무 릇 한문이라는 단어는 일본어와 한국어에서만 사용된다. 중국인은 한문이라 말하지 않는다. 중국인은 한문을 단순히 고문 또는 문언(文言)이라 한다. 학술용어로는 한문을 “고대한문”이라 부른다. 이것은 “현대한문 (즉 중국어)”의 반대 개념인 것이다.만약 중국어에 한문(한우엔)이라 하면 “한 문제(漢 文帝) 또는 ”한나라 때의 문장“ 등으로 한정된 의미가 된가 (청조시대에는 만주문자에 대해 만문滿文에 대해 한자에 의한 문장을 ”한문漢文“이라 불렀지만, 이것은 일본어의 한문의 의미용법과는 다르다)
필 자는 2000년에 “한문력(漢文力)”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다행이 호평을 받아 한국과 중국에도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한국판의 타이틀은 한글의 원문을 일본어로 직역한 “한문의 생활력”으로 “한문”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중국어 번역은 “무용술(無用術, 중국어 발음은 ‘우욘 슈우-‘)이라 하는 다른 타이틀을 사용했다. 중국어 판의 본문 중에는 일본어의 “한문”은 “고문”이라 번역했다. “한문” 그대로는 중국인에겐 통하지 않는 것이다.한시漢詩도 중국어에는 “구시(舊詩)”라고 한다. 중국어에서 한시라고 말하는 것은 한나라 시대의 시라는 의미로 한정하고 있다. 당시(唐詩)는 당나라 시대의 시이고 송시(宋詩)는 송대(宋代)의 시를 가리키는 것과 같다.
실은 일본에도 처음엔 한문이라고 하는 개념은 없었다. 히라가나와 카타카나 등이 보급된 이전은 일본에도 문정을 작성할 때 변체한문(變體漢文)과 순정한문(純正漢文)만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옆길로 새는 이야기지만 고대 일본의 “변체한문”을 “한화화문(漢化和文)”이라 불렀던 것은 漢文化된 和文, 즉 이전의 “화문”이 한문화 된 것이라는 오역을 하기 쉽다.하지만 역사적 사실로서 한문 이전의 화문은 존재하지 않았다.또, “변체한문”은 일본만의 것은 아닌 것이다. 조선인도 베트남인도 그리고 중국인에게도 중류계급은 순정한문을 구어풍으로 어지럽힌 변체한문은 순정한문과 다르게 언어학적 리던던시가 풍부해 중국인이 귀로 들어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중화민국(中華民國) 시대까지는 전통연극의 대사 또는 서간문 등의 변체한문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졸저-“한문의 소양” 참조)변체한문이든 순정한문이든 일본의 문장이 한문 온리(only)였던 시대에는 이것을 상대화하는 “漢文”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명치시대에 양복이 보급되기 일본에는 “和服”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과 같다. 한문학은 단순히 “문장”이라 한다. 한자는 마나(真名) 즉 “진정한 문자”라 했다. 단순히 재주(才)라고 하면 한문의 학재(學才)를 말하는 것이다. 일부러 “漢”이란 글자를 사용해서 구별할 필요가 생겼다.

헤이안 시대 중기, 국풍문화(國風文化)가 일어나 “和漢朗詠集(1013년 정도에 성립)” 과 같은 “和”와 “漢”을 대치하는 개념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세까지는 국문보다 한문이 고급언어로서 압도적으로 높은 위치가 되었기 때문에 한문의 상대화에는 철저하지 못했다.

에도시대에 들어서서 국학과 난학(네덜란드에서 유래한 서양학의 총칭)이 흥성하였고, 이러한 신흥 학도들은 원래의 학문을 “한학”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문”이라는 명확한 인식은 국학과 난학이 발흥한 에도시대 중기에 되어서야 간신히 확립된 것이다.

* 2008. 10. 13에 textcube.com에 올렸던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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